속죄라는 이름의 이기적인 도피, <어톤먼트>
1935년 영국. 사건의 시작은 부유한 탤리스 가족의 저택에서부터 시작된다. 사건의 중심 인물은 브라오니 탤리스, 세실리아 탤리스, 로비 터너 세 사람이다. 사건은 브라오니 탤리스의 시선과 세실리아 - 로비의 시선, 두개의 다른 시선으로 보여진다.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기 전까지 관객은 세실리아와 로비의 진실을 왜곡되게 바라본 브라오니를 탓하게 된다. 그리고 엔딩에 이르러 할머니가 된 브라오니는 자신의 행동으로 안타까운 사랑을 해야만 했던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이 때 관객은 앞서 보았던 모든 영화의 내용이 브라오니의 손에 의해 쓰여진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영화는 끝이 난다. 모든 결말을 알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그 어디에도 진실은 없다.
영화 전반적인 모든 시선은 브라오니의 시선이다. 브라오니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객관적인 시선을 가졌다고 착각을 하게끔 같은 사건을 두 갈래로 나누어 보여줬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전쟁사 속에서 비극을 맞이해야 했던 두 남녀의 사랑에 대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로 글을 썼지만 결국 ‘속죄’라는 이름의 갑옷 속에 철저하게 숨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진실이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해 죽은 두 사람이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소설 속에서는 결국 다시 사랑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결말을 보여줬다고 한다. 과연 그녀의 선택은 옳았던 것일까? 진실이 독자(혹은 관객)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져다 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 냉혹한 현실이 그녀에게 화살을 돌리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이 영화는 결말을 알고 난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을 때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브라오니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세실리아와 로비가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코 그 때문만은 아니다. 어디서 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인지 생각해보면 첫번 째는 로비의 태생부터라고 할 수 있다. 로비는 탤리스 집에서 일을 하던 일개 도우미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 집안 식구들과 함께 자랐고 세실리아 아버지의 도움으로 남부럽지 않은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탤리스 가족들에게 로비는 하인의 아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두번 째는 로비의 편지다. 장난삼아 쓴 편지의 내용을 브라오니가 보게되고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 오해가 브라오니로 하여금 왜곡된 진실을 보게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브라오니, 세실리아, 로비)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데에는 수많은 우연이 겹쳐져있다.
영화 <어톤먼트(Atonement)>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진실 속에 숨겨진 사랑 이야기를 필두로 하여 영화 속 배경이 되고 있는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브라오니가 간호사가 되어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 브라오니가 탤리스라는 성이 아닌 브라오니라는 이름을 군인들에게 말한 것을 수간호사가 단호하게 혼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영국의 간호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성만을 가진채 일을 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영화 속의 내용만으로 추측해보면 그 당시 종군 간호사들은 개인만의 특성은 버리고 간호사라는 직업만을 충실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전쟁이라는 비극과는 전혀 반대의 성격을 갖게 되는 역설적인 코드가 영화 속에 녹아 나오는데 폴 마샬이라는 인물과 맥주다. 폴 마샬은 로비가 감옥을 가게된 궁극적인 원인이 된 남자다. 그는 초콜릿 부자로 영국 남부에서 큰 초콜릿 공장을 운영하는 인물인데 던 커크 작전이 진행되던 때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를 찾아가는 모습을 뉴스로 보여주는 장면은 전쟁이라는 상황을 오히려 더 비극적으로 보여줬다. 맥주에 관한 장면은 아주 잠깐 스쳐지나간다. 다시 만난 세실리아와 로비가 헤어질 때 세실리아가 탄 버스에 붙혀진 맥주 광고는 참으로 눈길을 끈다. “Have a Guinness when you’re tired.” 일반적으로 초콜릿이나 맥주는 기호 식품이면서 정신적인 안정이나 불안을 해소할 때 찾기도 하는 식료품이다. 즉, 전쟁과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찾을 만한 필수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이런 요소들은 세계대전 속에서도 전쟁을 하는 사람과 그럼에도 풍류를 즐기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장 잔혹한 현실은 전쟁 그 자체다. 로비도 그렇지만 감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동적으로 전쟁에 참가해야했다. 로비와 그 일행이 프랑스에서 부대와 떨어져 길을 헤맬 때 길가에 독일군이 프랑스의 어린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을 보게 되는 장면은 그야말로 가혹한 상황을 보여준다. 로비의 일행 중 한 명이 한탄하며 하는 말이 그 당시 상황의 정곡을 찌른다. “……프랑스에서 싸우고 있는데 프랑스인들은 우리를 싫어해……인도랑 아프리카가 우리꺼지? 독일은 프랑스랑 벨기에랑 갖고 싶은거 다 가지라고 해. 제국주의는 다 땅 문제라니까? 제국이 더 필요하면 이 까짓 시궁창 가지라고 해!” 누구를 위해서 싸우는지, 왜 싸워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견뎌내야하는 전쟁이라는 무게는 너무 크기만 했다. 던커크의 마지막 후송 작전도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신문과 뉴스에서는 전략적 철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실상은 후퇴에 지나지 않았다. 후송을 위한 배가 몇 대나 있었지만 독일군의 폭파로 무산되고 마지막에는 부상자는 다 남겨야만 하는 실상이었다. 그 때의 상황은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성경에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실제로 던커크 철수는 영국과 프랑스 상층부의 수많은 오해와 의견 충돌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낳았던 작전이었다. 영화는 로비라는 인물을 빌려 군인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여줬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끝까지 숨겨진다. 속죄든 도피든 전쟁이든 그 어떤 것 하나 속 시원히 풀리지 않은 채 소설 속 허구적 결말만을 남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진실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진실은 다르게 다가온다. 브라오니도 세실리아와 로비도 서로가 생각하는 진실과 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 그들에게 안타깝고 냉혹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